아쯔시 : 생글생글론이 어지럽힌 가게를 바로 정리할 기분이 들지 않아서, 나카가와 상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맥주를 땄다. 석양이 지고 있는데 맥주를 마신다는 건 비교적 건전한 생활을 하던 나로선 평소라면 생각못할 일이다)
... 왠지 미안하네, 너에 관해서 기억하고 있다니까, 그냥.
토라지로 :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아쯔시 : 으음.. 너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아 미안, 이것도 쓸데없이 신경쓰는 건가?
(리틀리그에서부터 대활약 한 뛰어난 타자였던 토라지로는 몇몇 시립교고의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동네 고교를 코시엔 예선 결승까지 3번이나 데려간 근처의 영웅이었다. 그렇지만 나카가와 상에게 토라지로가 얘기했듯이 동네 주민들이 모두 믿었던 것처럼은 되지 못했다)
토라지로 : 아니, 단순하게 기뻤다니깐. 아직까지 기억해 준 녀석이 있었구나 하고. 이젠 꽤 옛날 얘기라구, 아~~주 먼 옛날 얘기. 어떻해!! 드래프트 안 오잖아! 라고 멍하게 있다보니 4년이나 지나버렸어. 언제까지나 가겔 도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뭔가 하지 않으면.... 말야.
아쯔시 : 야구는 이제 안 하는 거야?
토라지로 : 응? 으응~~ 야구는 말이지. 코스(?)라던가.. 될 것 같지 않고.
아쯔시 : 실업구단이라던가 이야기 없는 건 아니지?
토라지로 : 한국에서 하나 왔지만.
아쯔시 : 대단하잖아!
토라지로 : 나, 김치 못 먹잖아. 야구는 좋아하지만 말야.
아쯔시 : 그러면..
토라지로 : ... 그렇지만 이제 뭐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 끝나버린 거고. 나, 나 말이야, 그 때 드래프트 지명받지 못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는게 하나 있어. 이런 거 실패한거 아니라고 억지로 만든 이유인지는 몰라도 말야. 여자친구한테는 차이고, 친구도 엄청 줄고, 뭐 내가 엉망이기도 했지만 말이야. 그래서 혼자 뚝 떨어져서 주변을 돌아보니까 말이야. 나, 그때까지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아서 말이야. 돌아보니까, 그게 처음으로 본 나라는 걸 느껴버렸어. 이해 안 가려나? 사실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핫 ^^;;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러니까... '꼴 좋다'라던가 '한심해'라던가, '힘내'나, '잘 했어', '바보아냐?' 같은. 남을 배려하는 것 같은 거 말야. 분명히 훨씬 전부터 있었겠지만, 난 그 때 처음 봤어.
아쯔시 : 응
토라지로 : 사람이란 건 항상 나한테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대단해"라며 남들이 치켜세우니까. 계속 정상에만 있어서. 그래서 고교 졸업하고 아, 일단은 프로라도 해볼까~~ 라고 맘 먹고 말이야. 왠지 잘 말할 수는 없지만.
아쯔시 : 응
토라지로 : 그대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인간이 되지 않은 건, 지명 못받아서 딱 하나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엄~청 꼴 사나웠지만 말이야.
아쯔시 : 꼴 사납지 않았어!
(조금 의외였다. 무슨 계기에선지 처음으로 듣는 토라지로의 그 때의 일. 토라지로가 야구로 가장 잘 나갔을 때는 약간 멀어졌었지만, 그래도 끊어진 적 없었던 오랜 친구다. 그런데도 나는, 언제나 웃고 있는 토라지로의, 진정한 아픔을 깨닫지 못했다. 아마도..... )
정말.... 미안........
토라지로 : 왜 사과하는 거야. 겸사겸사 하나 물어볼까낭? 그 때, 왜 내가 기타센쥬의 별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말이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건 너 뿐이랄까? 왜?
아쯔시 : 왜냐니.... 으음... 너랑 처음 만났을 때, 너 아직 야구 하지 않았을 때고.
토라지로 : 그거야, 서로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니까 말이야.
아쯔시 : 역시, ... 정말 미안해. 나, 그 때 니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정말로 눈치 채지 못했나봐.
토라지로: 아냐아냐아냐, 유감이네... 라고 말했다구.
아쯔시 : 그렇지만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그런거지. 정말로 네 그런 기분, .... 몰랐어. 나 말이야, 아무래도 태평하니 행복하게 자라서 말이지.
토라지로 : 그런가? 잠깐 가게 안을 둘러보라고.
아쯔시 : 그거야 지금은 이렇지만. 엄마가 빨리 돌아가시고 아버지랑 형은 경찰이 날라올 만큼 사이가 안 좋았지만.
(평소엔 다들 신경써주느라고 입에 올리진 않지만, 나한테는 형이 있다. 여섯 살 위인 형은 늦게 태어난 나를 평범하게 귀여워 해줬지만, 아버지하고는 언젠가 한쪽이 죽을 때까지 계속 싸울꺼라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만큼 사이가 안 좋았다)
토라지로 : 사토루 상인가? 잘 지내려나?
아쯔시 :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아자부에서 셰프가 되서, 때때로 TV라던가 잡지에 나와. 아, 그래서.. 나는 아버지랑 형, 양쪽으로부터 귀여움 받아서 말야, 어리광 피우고. 별로 화내본 적도 없고, 남을 의심한다던가 그런것도 계속 없었고.
토라지로 : 뭐야, 지금은 있는 듯한 말투잖아.
아쯔시 : 아버지가... 앗, 아냐, 아니야. 괜찮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일이 생각나 버렸다. 내가 가게를 닫지 않고 있었던 이유.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토라지로 : 정말 뭐야, 얘기해 봐.
아쯔시 : 아아, 응. 아니 말 못해.
토라지로 : 아쯔시.
아쯔시 : 나 바보였었어. 다른 사람 모두 행복할꺼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도 형도, 자기도 행복하니까 말야, 다른 사람도 그럴꺼라고. 너에 대해서도 말이야. 미안해.
토라지로 : 뭐라는 거야? 뭐라고 말하는 거야? 난 행복해~ 언제나 꽤 해피 ^^ 라니깐~ 보면 알잖아.
아쯔시 : 물론 불행하다곤 생각 안하지만, ... 그렇지만.
토라지로 : 배려라던가, 봤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그게 말이야... 니가 매일 만들어 준 나폴리탄이었거든.
아쯔시 : 응?
토라지로 : 지금 생각해보면 내 태도가 최악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 때는 모두 나한테서 멀어지더라구. 프로야구선수가 못 된 나한테는 용무가 없는거냣! 라는 생각이 드는거야. "말 걸지 말란 말이야!" 라고 하면서도 왜 내버려 두는거야! 랄까.
아쯔시 : 그랬었구나. 하지만 그건 별 수 없잖아.
토라지로 : 별 수 없다라고 해도 말이지 부모도 슬슬 질려버릴 정도라서. 하지만 너, 매일같이 말야. 나폴리탄 만들 수 있게 됐으니까 먹으라고. 훗, 내가 자동차를 찼을 때도, 전봇대를 때렸을 때도, 술 먹고 쌈박질 했을 때도, 매일이라구.
아쯔시 : 매일매일 나폴리탄이었지만 말야.
토라지로 : 바보라고 하지 말란 얘기. 나, 내일은 니가 나폴리탄 먹으라고 말 안해주면 어쩌지? 라고. 제대로 해야지 하고 맘 먹었으니까.
아쯔시 : 토, 토라지로.
토라지로 : 지금 급한 건 네 쪽이잖아? 어떻게 할꺼야, 이 가게. 생글생글론은 또 올꺼야. 질기다고 그 녀석들. 내가 10만엔의 빚으로 어떤 꼴을 당했다고 생각해?
아쯔시 : 그렇지만 아까 나카가와 상이 총액에 가까운 금액을 냈으니까 당분간은....
토라지로 : 언제?
아쯔시 : 그러니까 비싼 시계를 맡겼잖아? 로렉스의 데이 뭐라고 하는...
토라지로 : 시계가 200만??
아쯔시 : 서민파인건 알았으니까 왠만하면 그쪽에서 벗어나줘.
토라지로 : 어떻게 갚을 꺼야?
아쯔시 : 오늘은 돈에 관한 이야긴 하고 싶지 않다고 돌아가 버렸잖아? 갚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토라지로 : 역시 그런 거겠지?
아쯔시 : 그러니까 그런 가치가? 어디를 어떻게 봐도 평범한 외모인 내 어딜 봐서. 아까 생글생글 루비론 녀석한테까지 들었다고. 헤헤거리는 평범한 형씨라고.
토라지로 : 그.러.니.까. 이상한 취미의 미각제로인 여자 혐오증이란 말이다.
아쯔시 : 심한 말을 태연하게 잘도 말하는구나, 너는. 침울하게 만들어 놓고.
(나카가와 : 뭐, 이걸로 참지. 나는 악식(惡食)이라구)
아쯔시 : (그렇지만 돌연히 나카가와 상과 생글생글 루비론의 대화가 내 귓가에 떠올랐다. 역시 그런건가? 악식(惡食)에 이상한 취미의.. )
(나카가와 : 사실 나도 와인같은거 조금도 좋아하지 않아. 여름엔 맥주다)
아쯔시 : 아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목적을 알수가 없어! 그렇지만 그 사람의 목적이 ...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내 요리를 맛있다고 생각해서 먹는 사람이
토라지로 : 나 말곤 없게 되는군.
아쯔시 : 아아아앙~ 토라지로.
토라지로 : 에에, 나는 정말로 맛있다니까. 진짜롯!!!
아쯔시 : 그렇겠지. 담배가게의 할머니가 만드는 무진장 짠 음식도, 생선가게의 밋짱이 만드는 달디달고 딱딱한 쿠키도, 어렸을 적부터 소스가 매웠던 구석 막과자 가게의 타코야키도 네가 진짜로 맛있어 한다는 건 알고 있어.
토라지로 : 이거봣!
아쯔시 : 농담, 농담. 진짜로 고맙다니깐. 내가 만든 밥을 계속 먹어주는 건 너 뿐인걸.
토라지로 : 똑같은 말을 하고 말이지. 왠지 우리들, 한심하네~
아쯔시 : 진짜로.
토라지로 : 뭐 노력하지 않는 건 아니고 말이야. 할 수 없잖아, 한심해도.
아쯔시 : (꼬맹이 시절엔 노력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고 믿었었다. 모두가 그렇게 믿었던 것처럼 나도, 토라지로도, ... 분명 나카가와 상도 그렇게 믿었을꺼다. 그렇지만 현실은 노력하면 반드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는 이루어지지 않은 그 후에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거다. 포기한 이후에도 인생은 계속 되는 거니까)
토라지로 : 가게 정리하자.
아쯔시 : 그렇구나. 나카가와 상이 안 온다고 해도 밤 영업은 해야지.
토라지로 : 아직, 노력할꺼야?
아쯔시 : 하아, 모르겠어. 나 자신조차 어떻게 해야할지. 그렇지만 또 다시 돈 빌린 셈이 됐으니.
토라지로 :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 그 사람. 하지만 보통은 아니지. 낮밤으로 오고, 비싼 와인을 맛있다고 생각도 안하면서 하루 한 병씩 마시고, 결국엔 돌려받을 가망도 없는데 200만엔이나 빌려주고.
아쯔시 : 한꺼번에 쭉 나열하지 말아줄래? 점점더 초조해 지니까.
토라지로 : 긴장 좀 하라구.
아쯔시 : (그 사람이 내 요리를 맛있어 하며 들려줄 동안은 이라고 어딘가 그걸 최후의 버팀목으로 삼고 있었다. 나는 결국 아버지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걸 연기하고 있었던 거다. 그렇지만 그렇게 믿는 것도 이젠 무리가 왔다)
뭐가 됐든 빚은 갚지 않으면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