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피린 덕분에 통증은 완화됐고, 에스카플로네 극장판을 본 덕분에 뇌의 과부하도 줄이고, 감동도 받고, 일석삼조? 여하튼 에스카플로네 코드 3 DVD 구입 기념 겸 재 감상기념겸 글을 써보는게 좋을 것 같다.
사실 스토리에 대해선 쓰고 싶지 않다. 내가 이 놈의 애니 삽질과 성우삽질을 시작한 계기가 된게 이 에스카 덕분이니, 나로서는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작품이고(물론 그 이전에도 열심히 애니는 봤지만, 애니 빠순이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에스카덕이고, 성우 빠순이의 길을 걷게 된 건, 카드캡터 사쿠라와 에스카의 더블어택-정확히는 세키 토모카즈 어택 덕분이니..) 그런 관계로 꽤나 실망한 극장판이라 할지라도 욕하고 싶지 않고, 욕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우선 극장판을 처음 본 것은 2000년, 일본 개봉 직후 돌기 시작한 캠코더판으로 당시 난 시험기간이었으며 받아놓고도 보지 않는다는 약간의 마조히즘에 입각한 자학과, 자기 인내 테스트를 하겠다고 시도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 결국 보고 말았다. 보고 실망했다. 조악한 화면이었고, 자막은 없었으며, 반을 비롯한 폴켄 등등이 너무나 산적화해서 그 충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난 극장판과 TV판이 별개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물론 캐릭터 설정은 미리미리 봐왔지만, 뭐랄까, 성장한 반과 히토미지 않을까 싶었달까? 생각해 보면 바보다, 그랬다면 죽은 폴켄이 산적이 되어 나타날리 없었는데.
결국, 충격에 휩싸여 시험은 못 보고-이건 핑계다- 나중에 자막을 구하긴 했지만, 그래도 충격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그 생각이 바뀐건 나우누리 앙끄동 시사회. 나와 같이 에스카 광팬인 분과 함께 갔는데, 역시나, 큰 화면에서 봐야지만 했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때다. 화면, 사운드, 그리고 화질... 캠코더판 이후 고화질 버젼도 구해서 보았지만, 역시나 15인치-당시 15인치 모니터를 쓰고 있었다- 모니터와 극장 화면은 달라도 엄청 달랐다. 물론 남산 애니센터의 화면도 극장화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감격스러웠다. 왠지 그동안 내가 TV판의 애정 때문에 극장판을 홀대했구나 하는 생각과 이제사 극장판의 진가를 발견했다느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나와 함께 갔던 분도 마찬가지였는듯, 그 후 우리는 남산의 애니센터의 무료 상영실을 빌려 카페 회원들과 함께 감상하는데까지 발전했지만 그건 그 이후. 여하튼 극장판의 재발견 덕에 그후 남산에서 하는 각종 애니동호회 시사회는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 나중에 한국판 더빙으로 시사회를 한다고 해서 다른 동호회의 시사회도 갔지만 소스의 문제로 결국 원판을 다시 보게 되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다시 큰 화면에서 에스카를 보는 건 역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보게 하자는 생각에 남산 애니 센터의 -예약후 다섯 이상만 참가하면 무료 대여가 가능한, 거기에 비록 작지만 아니 그래도 가로 3m 가뿐히 넘을 프로젝터도 있고, 5.1사운드 지원하며, 의자도 많은- 무료 상영관을 빌려 카페 회원들과 DVD 감상. 소스는 물론 내가 바가지를 써가며 구입한 코드 2 한정판 DVD. 그 뒤에 다시 같이 갔던 분이 구입한 코드 2 일반판으로 한국어 더빙 감상. 결국 극장비슷한 화면으로 2번, 나름대로 큰 화면으로 2번, DVD롬 사서 한 2번, 이번에 코드 3 한정판 구입하고 또 한번 본 셈이로군. ....
이번에 보면서 깨달은 건 저렇게 많이 봤는데도 새로운 장면이 있었다는 거다. 내가 그만큼 집중을 안해서 보는건지, 엉성하게 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작품이고, 잘 아는 작품이고, 많이 본 작품일수록 어느날 갑자기 발견하게 되는 소소한 장면들이 생긴다. 거기다가 캄캄한 방에서, 혼자서 스피커 켜놓고 보니까, 집중도 잘되고... 한가지 묘했던 것은, 솔직히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게 참 우스울 뿐이지만, 캐릭터나 메카가 거칠고 어두운 것에 비해 배경이 되는 하늘이나, 대지, 숲 등등은 굉장히 부드럽고 섬세하다는 거다. 너무나 아름다운 색감에 화사한 느낌이라 캐릭터나 메카 보다 배경에 눈을 사로잡히는 경우가 꽤 많았으니까. 그런 차이가 꽤 심해서, 가끔 배경과 캐릭터가 동떨어진거 같다는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꽤 자극적이고 매력적이다. 덧붙여 캐릭터의 움직임? 아바하라키와 용격대 등의 격투에서 보면 굉장히 빠르고 날렵한 움직임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알세이데스와 에스카플로네의 격투는 한박자를 더 넣어야 한달까? 휙! 하는 대신 휘이익~ 하고 한번 더 숨을 넣어야 하는 그런 둔중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거기다 굉장히 유연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고. 인간 캐릭터들의 싸움이 빠른 동작을 통해 힘을 보여준다면, 메카의 움직임은 둔중하고 느릿한 동작을 통해 박력과 힘을 느끼게 해준다. 이건 확실히 TV판의 메카움직임과는 다르다. TV판의 메카는 어디까지나 기계로 날카롭고, 재빠르며, 그러면서도 고상한? 메카 싸움의 로망을 느끼게 해준달까? 여하튼 TV판이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배경과 캐릭터와 메카였다면, 극장판은 어둡고, 음습하며,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화면은 둘째치고, 사운드만큼은 빠방한 대서 꽤 봤다고 자부하는데, 이번에 집에서 DVD 재생한 것 만큼 사운드로 감동을 느껴보진 못한 것 같다. 왜인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우리집 DVD 플레이 환경이 사운드에 비히 영상이 조악하달까? 한마디로 TV가 너무나 작다. 41인치의 작은 화면에 5.1의 웅장한 사운드가 어울리니 화면이 눌려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대신에 사운드의 효과는 대단해서, 솔직히 난 극장에서 반지를 봤을 때보다, 집 소파에 앉아서 봤을때, 더더욱 사운드에 눌리는 줄 알았으니까. 그, 난쟁이의 동굴을 넘어갈 때, 화살 날라오는 소리라던가, 위에서 돌 떨어지는 소리라던가, 너무나 생생해서 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도 전에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는데, 에스카의 에너지스트가 "두근두근"하면서 심장뛰듯이 뛸때, 나도 모르게 "아! 뛰고 있어!"하고 느꼈으니까. 단지 아쉬운 것은 우리집 마루가 굉장히 좁아서, 뒷쪽 라이트와 레프트 스피커가 거의 소파와 일직선이라 뒤에서 나오는 소리를 효과적으로 캐치하기 어렵고, 거기다 좌우의 대칭이 안 맞는다는 것. 이건 정말 아쉽다. 그렇지만, 이렇게 5.1 스피커의 위력을 실감하고 나면, 컴퓨터로는 더더욱 영화보기가 싫어지니...
가장 맘에 드는 장면은 역시나 마지막 장면. 주제곡 "반지"와 함께 노을지는 장면에서 화면에 점점 위로 이동하면서, 달과 환상의 달을 보여주고, 마지막에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여주는 장면은 너무나 멋지다. 예전에 카우보이 비밥의 13화에서 그 인디안 아저씨가 "별은 죽은 전사의 영혼"이라는 말과 함께 노을지는 하늘에서 점점 위로 화면이 올라가면서 조금씩 어두워져, 나중엔 까만 밤하늘에 별이 가득한, 너무나 멋진 장면이 펼쳐지면서 배경으론 엔딩곡 "리얼 포크 블루스" 대신에 "스페이스 라이온"이 흐른다. 내가 비밥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며,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고, 가장 좋아하는 화다. 에스카의 마지막 장면도 역시나 그걸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니 TV판에도 그랑 유사한 장면이 있었는데...
아름답게 펼쳐지는 밤하늘과 5.1의 사운드로 울려퍼지는 "반지"... 반지는 일어가 전혀 안되던 시절부터 밑에 히라가나를 적어 놓고 따라부를 정도라, 지금은 가사 없이도 부를 수 있고, 일본어를 조금은 알게 되서 가사의 의미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니까, 감동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 가끔 성우 캐스팅을 보느라 한눈을 팔긴 하지만 말이다 ^^;;
어쨋든, 이런 저런 얘기를 해도, 결국 난 에스카에 대해서만큼은 빠순이 모드다. 어쩔 수 없다. TV판을 보고부터 영혼을 빼앗겨 버렸으니까 ^^;;; 비록 첫 대면은 실망이었지만, 여러번 보는 사이 정이 들어버린 극장판 역시 나한테는 버릴 수 없는 사랑이다. 때때로 비운의 명작이니, 잘 만들어진 수작이니 등등의 소릴 듣지만, 그것조차 나한테는 소 귀에 경읽기 ^^ 무척이나 좋아했던 카우보이 비밥도, 수많은 이를 가산탕진의 수렁에 몰아넣었던 에반게리온도, DVD 출시만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중인 리바이어스도, 나에겐 어디까지나 에스카 다음이다. 한번 홀려버렸으니 어쩔 수 없달까? 다른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만큼 반해 버렸으니. 언젠가 나의 에스카에 대한 애정을 뒤흔들만큼 매력적인 작품을 만나고 싶지만, 사실 그렇다고 변심해 버리는 것도 조금 씁쓸할 것 같다.
.... 이것으로 에스카 코드 3 한정판 구입 기념 감상기로 될라나? 아직 TV판 DVD도 보는 중에 있기 때문에 또 에스카에 대해 글을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니, 솔직히 쓰고 싶지 않다. TV판에 대해 또 쓰게 되면, 힘들게 정리해서 마음속에 뭍어둔 에스카 엔딩에 대해 또 헤집어야 되니까. 그리고 말재간이 없어 자신도 없고... 오늘은 어디까지나 극장판 사운드 감상기 수준이니 ^^;;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멋지게, 내 나름대로 그 엔딩에 대해, 에스카에 대해 멋진 감상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만큼 내가 어른-나이론 이미 중늙은이에 해당하지만-이 되고, 글솜씨가 늘었으면...
이 기세를 몰아 비밥을 시청하러 간다. 중간에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TV를 빼앗기긴 했지만. 훗, 아버지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자도 난 책임 못져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