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tory/삽질인생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띵.. 2007. 2. 28. 23:58
그렇게 심하게 굽으셨던 허리가 펴지셨단 말에 곧 돌아가시겠구나 예감하기도 했고, 너무나 불길한 꿈도 꾸고 해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돌아가셨다니 좀 많이 섭섭하고 속상하다. 따뜻하게 보듬어 주신 적도 끔찍이 예뻐해주신 기억도 없지만, 언제나 명절 때면 "수남이 왔구나"라며 말을 건네주시곤 했다. 일찍 부모를 여위고 부모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탓에 자식을 이뻐하는 법도 손자를 예뻐하는 법도 모르시는 분이셨지만, 정이 없는 분은 아니셔서, 내 기억의 할아버지는 야단을 많이 치셔서 무섭긴 했지만, 항상 공평하셨다.
사실, 내가 내 나름의 타당한 이유덕에 끔찍히 할머니를 미워하고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먼저 돌아가신게 할아버지셔서 더 속상하기도 하지만 다행스럽기도 하다. 이것으로 드디어 할머니와 인연을 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일밖에 모르시고 성실하신 반면 주변머리가 없어 고생만 죽어라 했지 솔직히 가계에 그닥 보탬은 되지 않으셨던 우리 할아버지는, 고집도 있는 반면 생각도 깊으셔서 주변에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일만 죽어라 한 자신의 인생에 한풀이를 하신 적도 없고, 남을 속여본 적도 없고, 도박, 술, 계집질.. 이런 것과도 전혀 무관한, 정말로 소처럼 일만 하다 돌아가셨달까. 반면에 할머니는 줏대가 없고, 귀가 얇아서 솔직히 우리 어무이가 이 분 덕에 고생 많이 했다. 이번 할아버지 장례 절차만 해도 그렇다.

........작은 며느리 말에 솔깃해서 할아버지를 천주교 식으로 세례받게 하시고 천주교식 장을 치르신다더니 동네사람들 말에 또 솔깃해서 여기에 동네사람들까지 한몫꼈다. 덕분에 엉망진창이었다. 한쪽에서는 천주교 사람들이 와서 미사를 보고 한쪽에선 일가친척을 빙자한 찌끄러기들과 동네주민 나부랭이들이 술판. 가지가지다.

 나는 한번도 날 시골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난 비록 강북, 그것도 강서라고 하는 서울로 치자면 변두리지만(이 글을 읽은 강서사람, 부디 화내지 마시길) 그래도 서울서 나고 자라, 중간에 의정부니 동두천, 여기에 봉암리라고 하는 시골 깡촌 생활도 해봤지만, 내 나름대로는 난 도시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헌데 그게 아니다. 내 뿌리가 시골이니, 어쩔 수 없이 시골사람과 얽혀서 살아야만 한다는 걸 이번 장례식을 통해 어쩔 수 없이 깨닫고 말았다.

시골이 정이 깊다는 말 다 뻥이다. 물론 그런 동네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시골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온 동네 사람들이 뭉쳐서 움직이지만, 그 안에도 패가 있어서 거기에서 소외되면 어느 순간 온갖 이상한 말들이 돌아서 순식간에 상종못할 인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거기다가 그 뿐이랴. 시골도 돈이 중요하더라. 시골사람들 순박하단 말도 다 뻥이다. 돈 냄새 귀신같이 맡는다. 물론, 이것도 내가 아는 시골만의 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 집 아들 사업꽤나 한다더라는 소문이 돌았는지 울 할아버지 장례를 마치 동네 모임 자금만들 기회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잘사는 굴다리(속칭 윗동네의 별칭이라 하더라)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장터곡(속칭 아랫동네의 별칭이라 하더라)이 못살았는데, 그 못사는 장터곡의 사업 좀 한다는 아들을 가진 집이 상이 날 것 같다더라. 그리하여 아랫동네 대표이자 평소에도 할머니랑 친하게 지내는 속칭 xx네 아버지가 울 할머니한테 장례를 거들어줄테니 마을회와 부녀회에 약간의 기부를 해달라는 의사를 타진해왔고, 귀 얇은 울 할머니 넘어가서 교회식도 아니고 시골식도 아닌 묘한 장례판이 벌어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육두문자가 난무하니 좀 가려야 되겠다.



여하튼, 지긋지긋한 장례식이었다. 날뛰는 친척들과, 친척 나부랭이들과, 형편없는 동네인심에 질려, 내 마음속에선 항상 존경하고 사랑했던 할아버지를 맘속으로나마 제대로 보내드리지도 못했다. 아버지도 질렸는지 "이것들이 내가 사업 좀 한다고 벗겨먹으려고나 들고. 그래도 내가 사업이랍시고 뭐나 하니까 망정이지, 아직도 월급쟁이 신세로 빌빌댔으면, 날 얼마나 우습게 알고 무시했겠어?"라고 한마디.
동생 역시 질렸는지(그렇겠지, 너야 명절날 잠깐 제사드리고 곧 집에갔으니 그 면상들을 처음 봤겠지), "나 결혼하면 할머니 댁에도 와야해? 이렇게 말많고 시끄러운 동네는 처음이야. 정말 지긋지긋해. 요즘 여자애들은 약아서 이런 꼴 보면 당장 이혼이라구요. 누가 이런 걸 다 참고 살아?"

정말 지옥이었다. 일 거들려는 고모들은 별로 없고, 대신 일봐준다는 사람이 엉터리라, 울 어무이도 정신이 나가버렸고, 나랑 내 아우는 장손이란 이유만으로-난 유일한 친손녀란 죄로;; - 죽어라 일해야 했다. 이런 것도 모르고 회사 사람들은 푹 쉬었으니 좋겠다며 이죽대겠지.
이것으로 끝이면 좋으련만 할아버지를 보내드리는 일은 이제 한 절반정도의 여정인 것 같다. 49제까지 다 지내려면, 얼마나 많은 싸움과 얼마나 많은 난장판이 벌어질지. 다행스러운건 할아버지께는 남길만한 유산이란게 없어서(그나마 할아버지 앞으로 되어있던 땅은 팔아치워서 작은 집 아파트를 샀다. 이 일로 고모들이 얼마나 날뛰었는지;; ) 그런 꼴은 안 봐도 되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우리집은 무슨 일이 벌어지면 돈을 내는(내야만 하는) 나름 장남노릇한 아버지와, 어떤 굳은 일에도 허튼 소리 안하고 해낸(나는 그걸 바보같은...이라고 말한다) 어무이가 있어서 고모들도 큰 소리 칠 수 없는 입장이지만. 훗, 이번 장례치루는 동안에도 다들 찍소리 못하더라.

여튼, 지옥이다. 이제 지금 살고 있는 이 집 헐리면, 다들 우리보고 그 동네 들어가서 할머니랑 같이 살라고 압력넣을텐데. ........ 울 엄마 아부지가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내가 목숨걸고 막아야겠다. 불효녀에 싸가지가 없다는 얘길 듣더라도, 날 죽이고 들어가라고 해야지. 정말 죽을 각오로 말려야겠다.
덤으로 하나 더.
지난 번 설에 맹세했지만 다시 또 얘기하자면, 절대로, 절대로 이제 명절날 시골집에 내려가지 않을꺼다. 그동안은 혼자 일할 엄마가 안타까워서 꼭 같이 내려갔지만, 올해부턴 절대 안가. 이젠 할아버지도 안 계시겠다. 지긋지긋한 시골집이랑, 할머니, 친척 나부랭이들, 빌어먹을 시골사람들과도 인연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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